여성운동가 조아라
시대적으로 수난과 고난으로 점철된 험난한 시대를 살아 오신 조아라 선생은 1922년에 창설된 광주YWCA에서 총무, 회장, 명예회장으로서 평생을 헌신 봉사하였다.
가정법률상담소, Y신용협동조합, 농촌사업, 소비자운동 등을 통해 Y프로그램을 활성화시켰고, 1960년대 대의동 Y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80년 5ㆍ18민주화 항쟁당시 총탄으로 파손된 대의동 회관을 떠나 1985년 유동 현 Y회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광주어머니회, 걸스카웃, 광주여성단체협의회 등을 육성 발전시켜 여성들의 계몽과 권익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사회운동가 조아라
우리 사회의 가난과 부조리와 고충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고, 항상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소외당한 자의 대변자로서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였다.
호남여숙(야간중학), 성빈여사(육아사업), 계명여사(윤락여성선도 사업-직업보도사업), 별빛학원(야학반)등을 통해 불우한 이웃의 참된 친구가 되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 온 사회 복지사업의 선구자이다.
신앙인 조아라
선생은 이 고장 초대 교인이었던 조형률 장로의 자녀로서 수피아 여학교를 거쳐 이일학교의 교사를 역임하던 중 백청단 은지환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면서도 굳건한 신앙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신하였다. 또한 이 지역 최초의 여성 장로로서 NCC운동과 교회일치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기독교여성의 한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닮을까?" 하는 신앙인의 자세로 한평생을 살아 왔다. 그의 실천적인 기독교 신앙의 힘은 이 땅의 교회들이 가진자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며, 억압받는 자의 편에서 거룩한 예수님의 사랑이 이 땅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민주화운동가 조아라
암울한 조국의 일제식민통치하에서 독립과 주권회복을 위해, 독재권력 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수피아 여학교 시절부터 일제의 압박, 해방과 Y재건운동, 5ㆍ18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고난의 한복판에서 비켜서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역사의식을 지녔고 인권과 평등 의식이 투철하여 사회 정의와 수난에 동참하였으며 정의와 진실을 위하여 싸웠던 선생은 광주를 사랑하고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진정한 민주화의 어머니이다.
"이 모든 사건은 저지를 사람, 만든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과 역사가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전부 드러날 것이다.
사실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고 누군가 불을 질러 놨기에 그 불끄러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법은 어떻게 된 법이길래 방화범은 안 잡고
불끄러간 선의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렇게 죄인 취급하는 지 그것이 의아스럽다."
- 5ㆍ18 광주민주항쟁관련 군사법정에서의 최후진술 중 -
자료:조아라기념관. 편집:빛고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