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채(朴玄埰, 1934년 11월 3일 ~ 1995년 8월 17일)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1950년에서 1952년사이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지리산·백아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당하기도 하였고 1964년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7대 대선을 앞두고 제시했던 '대중경제론'에 영향을 끼친 그의 '민족경제론'은 '농업 협업화' 및 대기업 위주가 아닌 중소기업을 진흥하게 하고 수입대체 산업화를 통한 대외 의존에서 벗어난 자립 경제를 강조하였고, 이후 신식민주의 이론과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을 합하여 조희연, 이진경, 장상환, 전효관 등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창시하기도 하였다.
1934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부친 박경모와 모친 오순희에게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광주 수창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서중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빨치산에 참여하여 문화부 중대장 등을 역임하며 2년간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54년 전주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거쳐 195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61년에 졸업하였다. 김희숙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1959~1964년 한국농업문제연구회 연구위원을 역임하고 1964년 인민혁명당사건(人民革命黨事件, 인혁당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실천 활동과는 더욱 엄격하게 거리를 두고 정치경제학적 연구에 매진하였다. 1960년대부터 다양한 매체에 경제 관련 글들을 기고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였던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여러 진보적 경제학자들과 함께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부터 20여년 간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재야 경제학자 생활 끝에 6월항쟁 이후인 19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처음으로 제도권 학계로 진입하였다.
1986년 소설 『 태백산맥』이 출간되자 큰 자극을 받고 작가인 조정래를 만나 자신의 빨치산 경험을 들려주어 소설 속 빨치산 전사 조원제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 속에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1992년 가을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 생활 끝에 1995년 8월 별세하였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경제 평론 관련 글을 기고하기 시작해 수십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훗날 ‘민족경제론’으로 집약되는 주요 연구 내용은 농업에 있어 협업화를 위시하여 대기업 위주가 아닌 중소기업 진흥, 수출 대신 수입 대체 산업화를 통한 자립 경제 추구 등이었다. 이후 신식민주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설명하는 용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고 그 수탈을 보장하는 사회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와 독점 자본이 결합한 상태를 가리킨다. 1929년에 세계 공황을 계기로 주요 자본주의 국가는 이 단계로 이행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국가독점자본주의주 이론을 결합하여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초중반 이대근 등과 함께 사회구성체 논쟁을 주도하여 비판적 지식인과 학생운동가들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1977년 변형윤 등과 『한국 농업문제의 인식』 출간을 필두로, 주저 『민족경제론』을 위시하여 『전후 30년의 세계 경제사조』, 『민중과 경제』, 『한국 농업의 구상』, 『자본주의 발달사 연구 서설』, 『한국경제의 구조와 논리』, 『한국 자본주의와 민족운동』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2006년에는 평생 저술한 내용을 묶어 전 7권으로 『박현채 전집』이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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