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속명 박재철(朴在喆), 1932년 11월 5일 ~ 2010년 3월 11일)
1932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우수영에서 태어나 목포공립상업중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는데, 1950년에 한국 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게 되었고,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해 이듬해 승려 효봉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받고 1959년 27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서울 봉은사 다래헌(茶萊軒)에 살면서 운허와 함께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고 유신 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법정은 종교적이고 피안적인 글만 썼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불교계 인사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섰고 불교 승려로는 그 시절에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만약에 법정이 없었다면 그 당시에는 주로 기독교계(가톨릭, 개신교 포함)가 주도했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불교는 불의에 침묵했다고 부끄러워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을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불교 승려들은 극우 개신교 목사들처럼 교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독재에 편승하여 영합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서지도 않았다.
생애 대부분을 암자나 산골에서 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속세와 담을 쌓지는 않았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개신교인이자 사회운동가 함석헌이 1970년에 만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김수환이나 강원용 등 타 종교인들과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씨알의소리' 편집회의는 주로 장준하나 김동길의 자택, 그리고 봉은사 다래헌으로 옮겨 다니면서 열렸는데, 어디를 가나 정보기관에서 따라다녔고, 봉은사에서는 그날의 모임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다고 담당 형사가 전화로 상부에 보고하는 장면을 마침 목격한 법정이 홧김에 그 자리에서 그 형사에게서 전화기를 빼앗아 형사가 보는 앞에서 돌에 내던져 깨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법정의 몇 안 되는 감정표현이었다.
그러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박해를 받을 때마다 생기는 증오심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본분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그곳에서 홀로 지내기 시작했고, 산문집 <무소유>(1976년)를 저술해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조류와는 다른 삶의 길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이 시기 덕현에게 계를 주게된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는데, 오늘날의 템플 스테이의 원조가 됐다. 법정이 머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통과 현대, 불교와 대중의 소통이 있었다. 그는 관계의 단절자가 아닌 가교자였다.
무소유 외에도 여러 저서로 일약 유명해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자, 불일암 생활 17년째가 되던 1992년에 다시금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으로 이사를 가버리곤 법회 때나 가끔 산을 내려왔고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오두막 생활을 소개한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1995)와 <오두막 편지>(1999)를 저술했다.
1994년에는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으며, 1996년엔 기생 출신으로 백석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으로부터 서울 도심의 요릿집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 회주가 되었다. 김영한은 10년 전 법정의 <무소유>를 읽고 법정에게 자신의 전재산인 대원각 부지 7천여 평을 시주해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법정 본인은 10년 동안 받지 않고 버텼다. 그러다 1996년에야 시주를 받아들인 것. 이후 법정은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었고, 김영한은 3년 뒤인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뼈를 길상사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후 유언대로 그녀의 유해는 길상사 경내에 뿌려졌으며 길상사에는 그녀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1998년 길상사를 개원했고, 이 자리에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가 참석해 직접 축사를 하여 화제가 되었다. 법정은 평소에도 이해인 등 가톨릭계 인물들과 인연이 깊어 이를 계기로 김수환이 직접 축사를 온 것이었다. 법정 역시 1998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성탄전야미사에서 제대에 올라 강론을 하였다. 이때 법정이 "이 제단 위에 저를 올려주신 천주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강론의 첫 문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길상사를 개원한 후 법정은 다시 강원도 오두막으로 돌아가 1년에 봄·가을 정기법회 때만 길상사로 내려와 법문을 설파하였고 2003년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길상사에서 법회를 가졌다.
2002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법회를 가지고, 그라운드 제로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 때 법정은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준비중이던 이라크 전쟁에 대해 강한 반대 의사를 들어냈는데, 크게 포옹하려는 자세를 가지지 못한다면 어느 진영에 의해서든 전쟁과 테러는 계속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실제로 이라크전이 개전 초기의 기대와 달리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8년이 넘는 시간동안 내전을 거치며 수많은 테러가 발생하고 이에 따른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걸 생각하면 법정의 혜안은 현실이 된 셈이었다.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사리는 찾지 말고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입적 전날에 남긴 법어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2010년 2월 24일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2010년 2월 24일 법정 法頂(박재철)
강원도 오두막에서 자연 속 삶을 살다 가끔 내려와 법회를 가지던 무소유의 생활을 실천한 법정은 마지막 순간까지 버리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길상사에서 내려와 법회를 가지거나 교리교육을 하는 등 사목활동을 왕성하게 했으나, 2007년 10월 폐암 진단을 받고 2009년 길상사 봄 정기집회를 마지막으로 봉행한 뒤 연말에는 제주도에서 요양을 했다. 2009년 2월 김수환이 사망했을 때도, 건강 문제 때문에 직접 조문하지 못하고 대신 추도의 글을 보냈다. 그러던 2010년 들어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서울로 상경해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이미 병세가 심각하여 사망 6일 전인 3월 5일, 법정은 앙상해진 몸으로 산소마스크를 댄 채로 호흡을 하였다. 필담을 통해 얘기를 나누고 주위 사람이 말을 건네면 고개만 끄덕였다. 병원으로부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상좌들은 법정을 불일암으로 모시기로 했으나, 법정은 “불일암은 수행하는 곳이다. 이 몸으로 가진 않겠다. 내가 다시 수행할 수 있는 몸이라면 그곳으로 가겠다.”면서 반대했다.
결국 3월 11일 오후 1시, 상좌들은 법정을 길상사로 옮기기 시작했다. 길상사에 도착하자 링거를 꽂고 침대에 누운 법정은 구급차에서 내려 길상사 주지실로 향했고, 법정이 지나가자 대기하던 수많은 신도와 승려들은 합장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주지실로 들어간 법정은 40분 후 입적했다. 향년 77세, 법랍 55세.
3월 12일 오전 11시, 주지실에서 운구가 나왔고 신도와 승려 등 8,000여 명의 추모객이 길상사를 채웠다. 이중에는 가톨릭, 개신교, 원불교 등 다양한 종교인도 있었다.
이에 스님의 뜻을 따라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3월 13일에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에서 다비를 진행하며, 조화나 부의금을 받지 않았다.다비식 이후 나오는 사리는 유지에 따라 수습하지 않았으며, 유골도 49재까지 송광사와 길상사에 안치했다 조계산 불일암과 강원도 수류산방 인근에서 비공개로 산골하였다. 길상사에는 생전 승려가 사용한 유품과 영정을 모아뒀다. 생전에 법정이 나무 소비를 이유로 지인들에게 일반 화장장에서 다비해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만약 그 말이 진짜라면, 법정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입적 이후 원적(圓寂)과 함께 자신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출판물을 더이상 출판하지 말고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자신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법정의 유지가 공개되었다. 현재 법정의 모든 저술은 맑고향기롭게 사이트에서 전자책 형태로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다.
자료참조:나무위키, 편집:빛고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