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훈제 (桂勳梯, 1921년 12월 31일 ~ 1999년 3월 14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민주화 운동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본관은 수안(遂安).
독립운동, 한국 민주화운동, 통일 운동 등의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1년 12월 31일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부황동(現 동림군 부황리)에서 아버지 계봉집(桂鳳集)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형저(李亨姐)[3] 사이에서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살에 민족 학교였던 신성중학교에 입학했으며 그 곳에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그는 처음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열심히 돈을 모으고 공부하여 상경했지만 색맹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학업을 닦아 1943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한다. 대학생이 된 그는 일제의 강제 징집에 저항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고자 신의주로 떠났지만 체포되어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그는 독립운동 비밀결사 요원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8.15 광복 이후 계훈제는 경성대학 법문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였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경성제국대학의 후신)으로 돌아와서 우익 학생단체에서 활동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 1948년에는 김구, 김규식을 따라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다 1950년 폐결핵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며 9년 간의 투병 생활을 하였다. 그는 병이 회복된 1959년 다시 사회 운동에 뛰어들어 4.19 혁명부터 사회운동가로 활동한다. 4.19 혁명 이후에는 교사들의 노동조합 결성을 도왔고, 학생운동을 조직 및 지원하였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한일협정 반대투쟁, 월남파병 반대운동, 삼선개헌 반대운동 등의 각종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민주수호국민위원회', '민주통일국민회의'에 참여하여 장준하, 문익환과 함께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그 일로 1977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한편 1970년부터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에서 편집위원을 맡았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2년 정도 도피했으며,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의 각종 사회 운동은 물론 1987년 6월 항쟁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각종 민중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1999년 3월 14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자택에서 폐병으로 쓰러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세상을 떠났다. 북한이 사후에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외로운 신화」 (2000) - 산문집
「흰 고무신」 (2002) - 계훈제의 자서전. 죽기 직전 투병 생활을 하면서 집필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
중학교 시절 장준하와 동창이었다. 그래서 그와 친하게 지냈으며, 또한 함석헌, 문익환, 백기완과도 친분이 있었다. 계훈제까지 포함하여 이 5명은 형제와 자식처럼 지냈다는 후문이다.
본래는 김대중의 둘째 부인 이희호와 사귀던 사이었다. 이희호의 자서전에 따르면, 김대중을 알기 전 서울대학교에 다녔기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계훈제를 알게 되었고 그와 가까이 지내며 결혼할 마음까지 품었단다. 하지만 그가 폐결핵에 걸렸고, 자신도 미국으로 유학을 갔기에 관계가 깨졌다고 한다. 이후 부인 경주 김씨 김진주(金眞珠)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아들 계여곤을 두었고, 계여곤은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의사로 재직하고 있다.#
무척 간소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사시사철 옷차림은 흰 고무신에 작업복 차림으로 늘 다녔으며, 일생 동안 단 1번 밖에 구두를 신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날은 바로 장준하의 결혼식 주례를 선 날이었다 한다. 쉽게 말하면 본 문서 맨 위에 있는 사진의 모습처럼 옷차림을 하였다.
자료참조:namu.wiki. 편집:빛고을신문